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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대학원생으로서 보낸 첫 학기가 끝난다. 수강한 세 과목 모두 내용과 분량이 만만치 않은 기말 보고서 숙제가 부과되어 어제까지 그 모든 숙제를 끝내느라 진땀 좀 흘렸다. 하나는 '비정질 실리콘에서의 운송자 재결합 과정', 또 다른 하나는 '음굴절률 메타물질', 마지막 하나는 '프린티드 RFID 태그'를 주제로 했다. 세 가지 숙제를 모두 합치니 40페이지 정도가 나왔다. 숙제를 끝내고 나니 문득, '내 학부 졸업 논문이 13페이지쯤 됬었지?'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잠시 부끄러웠다.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급히 만든 시뮬레이션 결과만 가지고 쓴 논문이라 그 정도 밖에 분량이 나오지 않았다지만, 한 학기 내내 고생했던 결과가 기말 고사 기간에 급히 작성한 숙제 분량의 1/3 밖에 되지 않는다니. 나도 세상에 물들어 결과물의 질보다는 양 위주의 성과를 보여주는데 급급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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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 내로 첫 실험 결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 최근 몇 주간 무리한 실험 일정을 잡았었다. 그러나 조급함을 가지고 했던 실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하거나 결과가 깔끔하지 못했다. 뭔가 결과가 잘 나올 것 같은 날이면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그래서 요즘은 나 자신을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가스 레귤레이터를 날려먹질 않나, 멀쩡한 레이저 장비를 각도 틀어졌다고 신고하질 않나... 간밤에도 뭔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삽질을 했는데 다행히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이제 학기가 끝났으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실험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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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무렵까지 실험을 하느라, 오늘 오후에 있을 시험 공부를 못해서 결국 또 학교에서 밤을 새버렸다. 3~4월 무렵에 학교에서 밤을 샐 때는 그나마 체력이 좋아서 밤새 팹질을 하더라도 다음날 수업을 멀쩡히 들을 정도였는데, 5월이 되고 6월이 되니 그 체력이 모두 바닥나서 실험실이 아닌 연구실에 앉아 밤을 새면 꼭 조금씩은 잠을 자야 한다. 문제는 그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는데 있는데, 결국 시험 범위를 전부 커버하지 못하고 (1way scan...) 들어갈 것 같다. 아마 학부, 대학원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중고등학교때부터 모든 시험범위는 최소한 세 번은 보고 들어간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는데, 대학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진다. 다음 학기부터는 한 과목 덜 들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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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보고서를 작성하다 느낀 것이 있다. 기말 보고서 중 가장 분량이 많았던 '프린티드 RFID 태그' 보고서는 영어로 작성을 했다. 한글로 적어도 상관 없는 것이긴 했지만, 다른 주제로 중간 보고서를 제출할 때 분량을 늘리기 위해 일부러 영어로 적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왠지 영어로 적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영어로 작성을 했다. 20페이지 조금 못되는 분량을 영어로 적다보니, 내가 쓰는 문장이 상당히 형식화 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도한 수동태 문장이 사용 되었고, 내용적으로 논지 전개가 부족하다보니 접속사도 거의 모든 문장에 사용된다. 단어를 외우고 있는 폭이 좁다보니 문장을 쓸 때 같은 단어를 계속 쓰게 되는 경우가 많고, 복문을 쓸 때 평행성 원칙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자주 글을 쓰지 않고, 쓰더라도 정형화된 보고서를 쓰는 일이 많다보니 벌어진 일인 것 같은데, 일단 단어의 폭을 좀 늘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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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정신줄을 놓고 살다보니 심리 상태도 극도로 불안정해져 있다. 잘못된 실험 결과 하나에도, 외부 기관과의 업무상 트러블 하나에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미묘한 부정적인 기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계속 기분이 쳐진다. 그렇다고 가라앉아 있으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오늘까지는 끊어지려는 정신줄의 마지막 가닥을 부여잡고 있어보련다. 내일부터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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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꽤 글빨 잘 받는데...이거 보고서 쓸 때 터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꼬...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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